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문단 편집) ==== 백작 전쟁 ==== AD 1553년 프레데리크 1세가 사망하자 당연히 그의 장남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크리스티안이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그가 프로테스탄트 신자였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크리스티안 3세는 AD 1521년 신성 로마 제국의 보름스 회의에 참가하여 종교 개혁을 촉발시킨 [[마르틴 루터]]를 옹호했을 정도로 적극적인 프로테스탄트였고 AD 1523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이 된 뒤에는 자신의 영지에 이미 종교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크리스티안 3세의 프로테스탄트 성향에 대하여 덴마크의 통치를 담당하고 있던 국가 평의회(덴마크어 Rigsraadet)의 귀족들 대부분이 우려를 나타냈고 가톨릭 주교들도 가톨릭 신자 국왕을 세우기 위해서 크리스티안 3세 대신에 그의 이복동생인 한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3세를 지지하던 국가 평의회 의장인 모겐스 괴예가 AD 1534년 7월 국가평의회의 유틀란트 귀족 의원 8명과 유틀란트의 주교 4명을 소집하여 오랜 토론 끝에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서 [[크리스티안 3세]]가 정식으로 왕위에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토페르가 투옥되어 있는 크리스티안 2세의 석방과 복위를 주장하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백작 전쟁(Grevens Fejde)'이 시작되었다. 반란군에는 올덴부르크 뿐만 아니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메클렌부르크]], [[셸란 섬]], [[스코네]]의 귀족들과 [[코펜하겐]] 및 [[말뫼]]와 같은 도시들도 참여하였고 [[발트해]] 무역의 주도권 탈환을 원하던 북독일의 [[뤼베크 제국도시|뤼베크]]도 반란군을 지원했다.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토페르는 셸란 섬의 링스테드에서 자체적인 국가 평의회를 개최하여 스스로를 크리스티안 2세의 권한을 위임받은 섭정으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AD 1534년 크리스티안 2세 시절 사략선을 지휘했던 클레멘 안데르센이 유틀란트 반도 북부의 [[올보르]]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농민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사태가 매우 심각해졌다. 크리스티안 3세는 부왕 시절부터 충성을 바쳐온 요한 란차우에게 토벌군을 맡겨 올보르의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에 요한 란차우는 AD 1534년 12월 올보르를 함락시켰고 이 과정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벌여 최소한 2천명을 살해하였다. 이 때 반란군을 이끌던 클레멘 안데르센도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달아났으나 며칠 뒤 올보르 동부의 농민에게 붙잡혀 요한 란차우에게 넘겨지면서 [[비보르]]에서 재판을 받고 AD 1536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후 요한 란차우는 유틀란트 북부의 반란을 모두 토벌하자 이번에는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토페르가 있는 [[퓐 섬]]으로 진격하였다. 한편 당시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이미 루터교를 스웨덴의 국교로 선포한 상태였기 때문에 덴마크의 루터교 확대를 위해서 크리스티안 3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스웨덴군]]을 스코네에 파견하여 스코네 귀족들과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고 그 일대를 불태웠다. 이어서 [[할란드]]까지 진격하여 마찬가지로 폐허로 만들었고 AD 1535년 1월 헬싱보리를 함락시켰다. 이로서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토페르는 [[외레순 해협]] 동부에 위치한 덴마크 영토를 모두 상실하였다. 더욱이 퓐 섬으로 진격했던 요한 란차우와 AD 1535년 6월 왹스네베리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였다. 바다에서도 스웨덴 함대의 지원을 받은 덴마크 함대가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토페르를 지원하던 한자동맹 함대를 물리쳤다. 비록 코펜하겐과 말뫼가 AD 1536년까지 저항을 계속했지만 수개월 간의 포위전 끝에 모두 항복하면서 백작 전쟁이 종식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